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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이야기/~2017년

0. 도의회에 일하게 된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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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업무 PC에서는 내 개인적인 일을 절대 하지 않는다. 지금은 9월보다 소강됐지만 공채 기간이라 자기소개서와 입사지원서를 쓰고 독X사와 같은 취업 카페에 들락거릴 뿐 쇼핑몰을 들어가는 것도, 하다못해 영화나 TV 다시보기 페이지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 로그가 중앙 서버에 남는 것이 싫어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 계속 노트북을 들고 다녔다. 사실 그게 더 편하기도 하고, 정부 PC는 웹표준과는 거리가 굉장히 먼 IE에 ActiveX 떡칠된 컴퓨터인지라 괜히 쓰기 더욱 싫었던 것도 있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영상편집 하려고 새로 장만한 노트북이 에그 데이터를 이전 노트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잡아먹는 단점이 있어서 데이터 아끼려고 업무 PC에서 글을 쓰게 됐다.

 


일하는 날부터 도의회 스토리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격랑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배처럼 인간관계부터 주변 환경까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지나고보니 뭔가 하긴 한 것 같은데 결과가 나오지 않아 답답한 요즘, 이러다간 지금 주력으로 준비하는 곳도 떨어지겠다는 위기감과 패배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이런 글이라도 써야 '아 이 놈이 일을 하면서 뭔가를 하긴 했다'는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글은 가장 견고한 기억의 수단'이라고 하지 않는가.



 

각설하고, 내가 왜 도의회에서 일하게 됐는지 이ㅌ야기를 하면 좀 복잡한 사연이 있다. 많고 많은 이유 중에 세 가지만 간추리면

 

 

1. 1년 반 동안 지속된 취준 기간에 지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2. 일을 하면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3. 잠깐 거쳐가며 조직 생활 적응도를 높여 계약이 끝나고 다른 곳으로 바로 취직해서 빨리 적응하려고.


이 세가지 이유를 근거로 취직 활동은 잠깐 접어두고 일을 구하기 시작했다.





재작년 4월부터 정확히 4개월 동안 학교에서 외국어 관련 일을 하면서 '여기에 계속 있다간 내가 하고싶던 기획일, 하다못해 영업관리 현장직도 못하겠다'는 예감이 느껴졌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그나마 지금과 학교의 차이점이라면 이곳은 조직 생활이라는 걸 해봤다는 것이고, 학교 근무는 '아직도 학교에 있다'는 울타리에 있다는 안도감? 내성이 생겨서 무덤덤한 서류탈락, 될 것 같아 기대해서 더욱 허무했던 면접 탈락, 막상 붙었지만 워라밸이 개판이라 내 스스로 포기했던 기업까지 2년 동안 100개 넘는 기업을 쓰면서 취업을 준비함에도 내면이 비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인가, 남들은 취업 정말 쉽게 하는 것처럼보이는데 같은데, 내 스펙에 너무 높은 곳만 바라보는 게 아닌지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했다. 점프업을 노릴까, 계약 유형에 상관없이 일단 일이라도 하면서 준비할까, 알바를 할까 등등. 어찌됐든 결론은 하나였다.






일을 시작하자.





잠깐 거쳐가는 직장이라 생각하며 그 곳에서 취업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그렇게 쉽지 않았다.




내가 사는 동네는 일자리 퀄리티가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다. 광역도시가 아닌 이상 사정은 도긴개긴이겠지만, 이 동네는 심각한 수준이다.  어느정도로 심각하냐면, 지금 있는 자리에 면접만 열두 명이 왔다는 점? 중소/중견기업이 어느 수준인지는 모르겠지만 보고 들은 얘기로만 추측했을때 여기 계약직이나 이 동네 일반 회사의 급여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일을 병행하며 취업을 준비해야하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의 업무강도+개인시간이 보장된 곳을 알아봤고, 선택지는 공공기관 기간제였다. 당시 내가 지원한 기간제/계약직은 한국대학교육협의회(약칭 대교협), 전주시청, 그리고 지금 일하고 있는 의회사무처였다. 세 군데 전부 합격했지만 전주시청은 이미 6주 전부터 잡은 선약때문에, 대교협은 의회사무처 면접 시간과 묘하게 겹쳐서 대교협을 포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교협이 훨씬 더 나은 선택지인데 나가서 살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 회기만 아니면 정말 한가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공채 자소서 써본 가락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모두 쓰고 연락만 기다렸다. 그런데 왠열, 계약직도 경쟁시대라는데 이렇게 쉽게 서류 통과가 되나 싶을 정도로 이력서를 제출한 전주시청, 의회사무처, 대교협 모두 통과했다. 계약직 서류 3개 중 3개 모두 붙고 면접도 골라갔는데 그것이 의회사무처였다. 한 명 뽑고 계약 기간이 10개월인 자리임에도 면접보러 온 사람만 12명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나는 그 중심에서도 두 번째로 어렸다! 일자리 진짜 개막장 면접도 좀 재밌었다. 지금은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일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편입에 대한 미련을 못버려서 다시 한 번 준비하려고 계획했는데, 면접관 중 한분인 지금의 과장님이 내게 던진 마지막 질문이 '계약 끝나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였기 때문이다. 당시만해도 내게는 편입 마스터플랜과 편입학 합격 이후의 금전 조달 문제까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빼곡히 적힌 계획서가 있었다. 나는 그를 바탕으로 개략적인 청사진을 읊었더니 우리 과장님의 표정이 바뀌었다. 일하면서 여쭤보니 나이도 어린데 그런 계획까지 철저해서 놀라서 다시보게 됐다나.



일련의 과정을 마치고 나는 3월 2일자로 의회사무처 기간제 공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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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을 신나게 쓸 것 같습니다